가고 싶은 나라

[스크랩] 에쎈 성 미카엘 성당.

방 울 이 2013. 5. 5. 12:03



미리가본 이전 성당
(루르한인천주교회)

St,


St,Michael 성당(전면)


<에센 성 미카엘(St. Michael) 설립 역사>

19세기 말 20세기 초, 에센과 루르 지역 일대는 이미 광산업과 철강 산업으로 산업화가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노동자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들이 지어 졌다. 이렇게 하여 에센 중앙을 둘러싸고 새로운 시구역들이 발생하였으며, 이 시 구역들은 구역의 방위에 따라 이름 붙여 졌다. 1897년 남 사목구가 1904년에 북 사목구가 설치되었다. 에센 중앙 교구의 사목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쉬텔레 산(Steeler Berg) 이라 불리우던, 오늘날의 쉬텔레 가(Steeler Strasse) 주변 지역의 에센 동구(Ostviertel) 또한 독립적인 사목구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1898년에는 천주교 공동체 학교 X(X: 로마어로 10이라는 뜻)가 Wachtler Str.에 개교하었으며 1898년 9월 29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에 축성을 받았다. 이 학교 개교를 맞아 464명의 어린이들이 입학하였다. 1900년 1월 30일 성 요한 아르놀트 라이너스 신부를 대표로 하여, 성 미카엘 교회 건축 모임이 창립되었다. 1900년 3월 8일 쉬텔레 산의 물탑(Wasserturm) 회관에서 에센 동구의 천주교인들이 모여 쉬텔레에 지어질 가톨릭 성당의 건축 준비위원회 회칙을 제정 통과시켰다. 1901년 1월 27일 성 미카엘의 성가 모임이 생겨났으며, 1년 후 전례부 모임도 결성되었다. 원래는 당시 상황에 맞게 목조건축 양식으로 된 일종의 가건축 성당을 계획하였으나, 관청의 허가를 득하지 못하였다. 당시 교회 건축은 석조 건물로 짓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





THE SUN FORTRESS

(후 면)

<전쟁 전의 교회와 교회 공동체>

신 로마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건축물은 에센 건축가 빌헬름 벤호펜(Wilhelm Venhofen)이 설계하였다. 약 4만 8천 마르크를 들여 지어진 교회 건축물의 축성식은 1903년 10월 11일에 있었다. 이를 위해 에센 교구의 사제들은 쉬텔러 쇼세(오늘날 쉬텔러 가 Steeler Str.)와 레오폴트 가를 지나 성 미카엘 성당이 위치한 배히틀러 가(Wachtler Str.) 52-54번지까지 행렬을 하였다. 하인리히 기스베르트가 성당 관리인이있다. 공동체 학교의 교장 겸 최초의 주임 신부는 구스타프 마이네르츠 신부였으며 당시 등록된 가톨릭 신자 수는 5000명 이었다. 공동체 학교 X 는 15 학급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000여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다. 1904년 말까지 이 공동체에서 109명의 아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25쌍이 혼배 성사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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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t Mountain Colors

(측 면)

<2차 세계 대전>

1939년 4월에 학교에서 십자고상이 철거되었다. 1939년 9월 3일 주일 미사에서 폭격기 경보로 인해 강론이 중단되었다. 4일 뒤에 공중전 방어를 이유로, 교회 타종이 금지되었다. 이 금지는 10월 29일 완화되었다.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3분 정도 타종이 허용되었다. 공동체 회관 지하실은 보호 지하실로 갖춰 졌으며, 교회 건물들의 다른 지하실들도 1년 후에 그렇게 되었다. 그리하여 500명 가량이 성 미카엘 교회에 수용할 수 있었다. 교회 파이프 오르간이 수리를 위해 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1939년 10월 1일 파이프 여덟 개 짜리 작은 파이프 오르간을 제대에 설치하였다. 파이프가 31개가 된 새 오르간은 1940년 6월 16일에 축성되었다. 그 당시의 주임 신부였던 알로이 쾨니히 신부는 첫영성체를 위해 공용 옷을 구입하였는데,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첫영성체 옷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거나, 또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었거나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 단일화된 첫영성체 옷에 여자 아이들은 노란색 띠를, 남자아이들은 빨간색 띠를 둘렀다

<폭격>

1942년까지는 성 미카엘 사목구역은 많은 공습 경보에도 불구하고 폭격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1942년 3월 9일 처음으로 Ruhralle에 있던 집 한 채가 폭격되었고, 그로 인해 Steller Str. 와 Michaelstr. 창문까지 흔들렸었다. 1943년 3월 6일 새벽 성 미카엘 성당은 대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1944년 6월 18일 500여명의 신자들이 잿더미를 치워낸 뒤 파손된 성 미카엘 성당 안으로 모여들었다. 본당 설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성 미카엘 공동체도 독일 민족의 쇠붙이 모으기 운동“에 따라, 교회에 있는 쇠붙이로 된 물건들을 반납할 수 밖에 없었다. 1944년 10월 23일 또 공중 폭격이 있었고, 창문, 문과 천장이 또다시 크게 파손되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내리는 가을비가 교회 안으로 새 들어와 성당 내부도 많이 훼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성당 길이라도 치우기 위한 복구 작업에 발벗고 나섰다. 본당 신부는 침실과 부엌, 그리고 지하실 사제관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었고 때문에 아직 공동체에 머무를 수 있었다. 겨울까지 공습은 계속되었고, 1944년 성탄절에 크게 망가진 임시 성당에서 요세프 헹스트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였다. 헹스트 신부는 불과 몇일 전 수품을 받았으며 나중에 에센의 경찰 신부가 되었다. 대림 기간 동안 성당은 계속된 폭격으로 더욱 파손되었고 Michaelstr. 쪽으로 있던 벽이 붕괴되었고, 창문과 문이 남김없이 부서졌으며, 임시 제대도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신자들의 도움으로 미사는 진행할 수 있었다. 1944년 성탄 이후 2달 동안 공중 폭격이 없었으나, 1945년 2월 23일 Wasserturm 부근 지역은 또다시 불타게 되었다. 1945년 3월 12일 주일 미사가 끝나고 15시 경 네 차례에 걸쳐 수없이 많은 폭탄이 떨어졌다. 이 중에 사제관이 완전이 파괴되었다. 경당 뒷 부분도 완전히 허물어 졌고, 앞 쪽은 크게 파손되었다. 제대는 물론 남아난 성당 내 모든 구조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 미카엘 성당 전체가 파괴된 것이다. 중요한 성당 자료들을 보관하던 금고는 나중에 잿더미에서 발굴해 내었고, 내용은 훼손되지 않았다.




DREAMSCAPE

성당 정문 앞



<전후 복구 작업>

1945년 4월 10일 최초의 미군들이 Ruhrallee 로 진입하였다. 4월 21일부터 성 미카엘 본당은 가가이 있는 Viktoriaschule 에서 미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그리로 가는 길에도 잿더미로 뒤덮여 있어 길을 치워야만 했다. 천장은 완전히 뚫려 있었고 난방도 불가능했다. 6월에 Steubenstr. 와 Mantueffelstr. 에 있던 Gau DAF 회관의 1층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임시로 이곳에 벙커에 있던 의자들과, 판자로 만든 제대를 설치하였다. 1945년 9월 쾨니히 신부가, 2년 뒤에는 하인리히스 군종신부가 이곳에 부임하였다. 1945년말에 성 미카엘 사목 구역에는 다시 3000여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집계되었고, 그 중에 상당 수가 에센의 다른 지역 출신들이었다. 교회 공동체의 많은 신자들이 더 이상 성당 근방에 살고 있지 않았고, 때문에 공동체 생활 재건이 매우 어려웠다. 1946년 말 도서관이 다시 개방하였고, 여기에 게쉬타포에 의해 압수되었던 2천여권의 책들을 비롯하여 잿더미에서 구해낸 책들을 다시 비치할 수가 있었다. 서서히 크고 작은 구역 모임들, 소규모 성가대 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성당 건물을 신축하는 것은 재정적인 면에서 아직 불가능하였다.

<공동체 회관의 재건>

우선 폭탄으로 파손된 Michaelstr. 와 건물들을 잿더미에서 치우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회관 건물을 임시성당으로 재건하기 위해,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도왔으며, 아직 재활용할 수 있는 벽돌들을 닦았다. 새로 결성된 사목회는 1948년 말까지 1만 마르크를 모았으며, 1949년 2월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추가로 5만 마르크를 대출받고, 에센 교구로부터의 지원금, 그리고 공동체 자체의 2만 6천 마르크의 자기 자본으로 1949년 9월 29일 Michaelstr. 회관 재건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근방에 새로이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므로, 공동체 신자들의 수는 1949년 한 해에 1000여명이 더 늘어났다. 1950년에 회관에 작은 종이 설치되었다. 1951년 초 소년 성가대가 결성되었다. 옛 교회 터에 새로이 주택도 완공되었다. 회관 내에 위치한 임시교회에는 1952년 부활절에 성 미카엘의 초상이 그려진 벽 양탄자가 걸리게 되었다. 1952년 12월 14일 4개의 파이프를 가진 새로운 파이프 오르간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



<성 미카엘 새로운 성당>

<건축 계획>

1951년 7월 6일 상임 위원회의에서 새로운 성 미카엘 성당 건축 계획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52년 9월 14일 새로운 상임 위원회가 선출되었을 때, 건축 계획은 물론 재정도 통과되어 있지 않았다. 1953년 6월 8일 상임 위원회 회의에서 에센 건축가인 하인리히 뵐의 설계에 따라 교회 건물의 신축이 결정되었다. 1953년 9월 1일 대주교청에서 건축 허가를 내려 주었으며, 재정은 7월 24일에 벌써 승인되어 있었다. 새로운 성당 건물은 이제 Michaelstr. 54 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개공식부터 완공식까지>

1953년 9월 6일 12시 15분 쾨네 신부가 첫 삽을 떴다. 같은 해 10월 25일 요셉 페르헤 부주교와 함께 초석 놓기 행사가 성대히 이루어 진 후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54년 10월 2일과 3일에 걸쳐 성당과 제대가 축성되었다. 특히 제대에는 Gereon 성인과 Ursula 성녀의 유골이 모셔졌는데, 이는 쾰른 대교구로부터의 선물이었다. 1954년 10월 10일에 새로운 성당 건물에서 공동체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였다.
1956년 에센을 가로 지르는 고속도로(Ruhrschnellweg 40번 고속도로) 증축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공동체 구역이 불가피하게 다시 나누어지게 되었고, Wachtlerstr.(옛 교회터)에 있던 새로운 주택들과 유치원이 고속도로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유치원은 이제 새로 지은 교회 뒷편에 지어졌고, 1962년 2월 3일 완공되었다. 쾰른 대교구로부터의 3만 6천 마르크를 지원금과 자체 충당한 3만 마르크로 1958년 성체성혈 대축일에 교회탑 공사가 시작되었다. 교회탑은 성당 건물과 동떨어져 있는 형태이다. 1960년 5월 27일 파손된 옛 성당에서 3개의 오래된 교회 종을 다시 설치하였다. 이 세 종의 이름은 각각 미카엘, 요셉, 마리아로 지어졌다. 추가로 성 하인리히와 성 마틴이라 이름붙인 두 개의 종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2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축성하였다. 이 다섯 종의 음은 d, f, g, b, c 로 각각 조율되었다.



Sandstone Falls

실내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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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후면

<건축양식과 실내 공간>

건축가 하인리히 뵐은 1950년대 초에 그 당시 보다 20년 전의 성당 건축 양식에 따랐다. 이에 따르면 교회는 가로 폭보다 3배 더 긴 세로의 직사각형에 그 양 옆으로 측면 통로를 붙이고, 제대 앞쪽 사각은 약간 구부린 형태로 되어 있다. 전체 성당 건물은 서향으로 지어졌다. 성당 내부 공간에는 교회 양 좌석들 사이를 통과해 앞으로 나가고 나면, 앞쪽에 조금 높아진 제대층이 있고, 그 옆 오른쪽에 일전에 경당으로 쓰이던 기도실(Oratorium)이 있다. 성당 뒷쪽(입구쪽)에는 맨 아래쪽에 세례소가 있고, 윗층에는 다색 벽면이 있는 파이프 오르간 대가 있다. 천장은 길게 꺾여진 형태로 되어 있고 사각 문양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푸른색 채색은 앞쪽으로 갈 수록 옅어진다. 성당 건물 외벽은 습기 방지를 막을 목적으로 무기질 판넬로 처리되었다. 1980년대 말 성 미카엘 교회는 에센의 건축가 Franz-Josef Gierse 에 의해 기술적으로 또 건축물리적으로 완전히 보수되었고, 내부 공간이 완전히 새로운 색조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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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대

<제대 공간>

계단 4개 높이의 제대 공간은 거의 검은 색 바닥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제대는 1965년 세워졌으며 보훔의 Theodor Imberg 사에 의해 제작되었다. 제대 뒷벽에는 2004년까지만해도 높이 12미터, 폭 4미터의 벽 양탄자가 걸려 있었다. 쾰른 예술가 Milli Schmitz-Steinkruger 1958년 3월 28일 성지주일에 만들어 걸어 놓았던 것이다. 1956년 상임위원회의 벽 문양 구입 결정이 있은 뒤, 예술가가 1년 반 만에 양탄자를 제작하였다. 맨 위 삼 분의 일은 자비석의 형태로 삼위일체 주제를 나타냈다. 어좌에 앉은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릎에 안고 있었고, 그 위에 성령의 비둘기, 그리고 기도하는 여덟 천사들을 볼 수 있었다. 아랫쪽에는 네 분의 대천사들이 있었다. 위의 8천사와 함께 12이라는 상징적인 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벽양탄자에는 왼쪽에서부터 봤을 때 우리엘, 이 성당의 수호천사인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순서로 그려져 있었다. 또한 여기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사탄이 땅에 떨어진 뒤에 미카엘이 이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장면도 그려져 있었다. 이 벽 양탄자는 2004년에 성 미카엘 100주년에 세탁 중에 완전히 훼손 되었고 다시 걸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제대 뒷벽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그리스도 상이 걸려 있는데, 이는 알텐에센 Basunestr. 에 있던 개신교 삼위일체 교회-이미 철거됨-에서 가져 온 것이다. 높이 4미터 폭 4미터의 나무 예수님 상은 1955 경 어떤 바이에른 조각가가 만들었으며, 지구 위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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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오르간

<파이프 오르간>

도르스텐 Franz Breil 오르간 회사는 1954년 두 개의 건반과 11개의 파이프를 갖춘 오르간을 제작 설치하였다. 1967년 오르간은 확장되었고 추가로 6개의 새로운 파이프를 갖추게 되었고 2년 후 4개의 파이프열이 추가되었다. 1975년 페달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파이프가 네 개 더 늘어났다. 1977년 확장공사 이후 오르간은 전체 28개의 파이프를 갖게 되었고, 1977년 10월 8일 최초로 오르간 연주회가 있었다. 1990년 4월 22일, 4년간의 기획 및 실행 단계를 거친 후, 성 미카엘 성당에는 새로운 파이프 오르간이 서게 되었다. 새로운 오르간은 브뤼셀 Maufacture d’orge 라는 회사에 의해 성당 건물의 음향 조건에 맞게 제작되었다. 새 오르간은 모두 3개의 건반과 32개의 파이프 및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나무틀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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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소

<세례소>

원형의 난간 안쪽으로 두 개 계단을 내려가면 팔각의 자연석으로 만든 세례 분수가 놓여져 있다. 이 분수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Descendit in Hanc Plentitudinum fontis virtus spiritus sancti (원천의 가득함 안으로 성령의 힘이 내려온다) 그 아래에는 Fons vivus Aqua regene Unda purificans (살아있는 원천 솟아나게 하는 물 씻어주는 물결). 이라고 새겨져 있다. 세례 장소 뒤의 벽에는 예술가 비올라 킬리안(Viola Kilian)이 작품인 세례 문양을 볼 수 있다. 세례 장소의 앞에는 성수받침대를 겸한 석조 촛대가 위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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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창문>

성당 양쪽 벽에는 1954년에 울긋불긋한 유리로 된 14개의 창문이 설치되었다. 에센의 화가 쇨러(Scholer)가 도안하여 유리 공예소 데릭스(Derix)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 창문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나오는 성경적인 주제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아브라함의 이삭을 봉헌하는 장면, 삼위일체의 그림 등. 그 외에도 성 미카엘 성당에는 1972년과 1973년에 걸쳐 추상적인 다색 유리 창문들을 달았는데, 이는 에센의 예술가 Willi Heinzen 씨의 도안에 따라 유리 예술가인 오토 페터스의 공방에서 특수 제작된 창문들이었다. 다른 예술가들은 이러한 밝고 울긋불긋한 유리 표면들을 묵시록의 성경 문구에 따라 해석하기도 한다. "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요한 묵시록 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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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기타 예술 조형물들>

성당 동쪽 외벽에 설치된 성모 마리아 상은 1964년 5월 31일에 마련된 것이다. 2미터가 높이의 마리아 상은 보트롭 출신의 요한네스 피쉐딕이라는 조형 예술가의 작품이다. 성당의 측면 내벽에는1963년 이래로 조형 예술가인 하인리히 게르하르트 뷔커의 정사각형 청동 부조 14점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곧 십자가의 길 14처 상이다. 뒤편 왼쪽 입구에는 에케 호모(Ecce homo) 상이 서 있는데, 이는 가시관을 쓰고 조롱받는 고통의 예수님을 나타낸다. 이 상은 1963년 고트프리트 카펜이라는 작가가 유리섬유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오 상도 같은 해 같은 작가가 제작하였다. 또한 성당 내부에는 이른바 마리아 제대‘가 있는데, 제단과 비슷한 받침대 위에 초와 꽃을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벽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일종의 성화가 걸려 있다. 이 성화는 에센 후트롭 출신의 예술가 클라우스 창게를레(Klaus Zangerle)가 도안한 것이다. 평일 미사 경당 안에 있는 십자고상과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 타대오 상은 나무로 된 조형물로서 성당의 전체적인 예술성을 마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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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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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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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공간

성당 밑 지하에 부엌이 딸린 큰 공간이 있어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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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과 사제관

성당 옆 길 건너에 자리한 회색집의 유리벽돌로 쌓은 단층이 강당이고 1층이 사제관이다.
사제관은 총 면적이 약130 m2에 부엌.화장실.그리고 방이 다섯개 이다.
방 두개는 신부님이 사용하고 나머지 세개는 수녀님 사무실.도서실.회의실로 사용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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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작은 무대와 약120석의 의자를 놓을 수 있고 오른쪽으로 큰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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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강당

중간에 아코디언 칸막이가 있어 소 강당으로 사용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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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길

Dortmund,Duisburg방향에서 오시는 분
A40-Ausfahrt-Huttrop,Steelerstr,
Steelerstr,(Am Wasserturm.사진)에서 오른쪽.
Kurfuerstenstr,에서 오른쪽.

"아~~드디어 목적지 도착!!"

St, Michael Kirche
Steubenstr,49
45138 ESSEN



<이전 첫 미사 예정일>

2013년 10월 27일
(이 날은 루르한인천주교회 창립 22주년 기념일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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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이전을 위한 기도문

+ 성호경 +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렇게 40년 광야 길을 함께 걸어주신 하느님
저희 루르 한인 공동체가 당신 이끄심 따라
새로운 신앙의 둥지를 마련 하고자 하나이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믿음의 못자리를 짓게 하시고
편안함이 아니라 간절함이 그 울타리 되게 하소서.
본당 이전을 위하여 묵주의 기도를 바치오니
공동체의 모든 신자들이 새로운 성전에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준비하고 봉헌 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본당 이전을 위한 묵주의 기도를 바침니다.)









홍보부
본당 이전을 위한 기도문을 추가 하였습니다. 2013-03-30
07:49

출처 : 허심촌
글쓴이 : thomas 원글보기
메모 : 많은 도움을 주신 수녀님이 이 성당에 계실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