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치

"호남사투리 고치라고요? 그건 내 정체성인데… 싫소"

방 울 이 2014. 2. 11. 21:17

 

"호남사투리 고치라고요? 그건 내 정체성인데… 싫소"

 

 

국가 ‘환란’에서 구하고 IT강국 초석… ‘비주류 정치’ 성공시대 열어

노벨상 거머쥔 햇볕 대통령… 對北 ‘퍼주기’ 라는 비판 받기도

 

 

 

 

김대중은 어떤 인물이었나?

이 사회에는 중심부(center)에 속한 사람들(주류의 주류)이 있는가 하면 중심부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주류의 비주류)이 있고, 중심부에 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비주류의 주류)이 있는가 하면 먹고살기바빠 그런걸 생각할 틈도없는 사람들(비주류의 비주류)도 있다.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은 출생·성분·학벌·인맥·지역 등에서 비주류의 주류 정도에 해당하는 주변부(periphery)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중심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주변부 또는 변두리 출신은 개인적으로 흔히 사법고시나 사업 등을 통해 중심부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자신이 속한 주변부 자체를 중심부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해방 후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몇 번인가 낙선한 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적어도 3공 중반이 될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삶이 분명해지면서 그는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이 필요했다. 그의 대통령 꿈이 태동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 꿈이 밖으로 표출된 순간부터 그는 십자포화를 받기 시작했다. 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진보적 정책을 들고 대통령에 출마해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과격 인물로 몰렸고 용공으로 낙인 찍혔다.

지난날 이승만(李承晩)의 위협적인 선거 상대였던 조봉암(曺奉岩)이 간첩죄로 몰렸던 것처럼 그 또한 현상(status quo)을 뒤흔든 괘씸죄로 몰렸다. 이후 구속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국외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오히려 망명생활을 통해 국제적 거물이 되어 돌아왔다.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 그의 의지가 놀라웠다. 그는 색깔론 이외에도 ‘거짓말쟁이’ ‘권모술수의 대가’ ‘지역감정 이용자’ ‘대통령병 환자’ 등 온갖 야유와 정치적 냉소 또는 혐오를 받으면서도 대선 4수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소수 정권이었다. 그 때문에 IMF 환란을 수습하고 IT산업을 일으켰으며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성과를 보였음에도 집권 내내 다수파에게 휘둘려야 했다.

 

지지 기반인 진보세력의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생성·증식된 진보세력은 소리만 요란했지 실제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 호남세력을 덧붙인 것이 그의 지지 기반이었다.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드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제2기 진보정권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분열과 불협화음 속에서도 진보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대중과 4대 콤플렉스

 

흔히 김영삼(金泳三)을 김대중의 라이벌이라고 한다. 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자료를 좀 더 섭렵해보면 그는 두번째 라이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라이벌은 박정희(朴正熙)였다.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의 마음의 라이벌이 김대중이 아니라 김일성(金日成)이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라이벌이 있었다. 이 세 번째 라이벌은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들고 싶은 그 자신의 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난이 박정희에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처럼 성취 동기 면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4대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출생 콤플렉스였다.

1923년 전남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云式)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張鹵島)의 4남3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공식기록이지만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기록에는 그 출생 내막이 좀 더 복잡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다 무시한다 하더라도 그가 필자였던 점은 그 자신이 밝힌 바 있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학력이다. 마을 서당에 다닐 때부터 장원을 했었다는 그는 하의보통학교→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재학 시절 작문과 역사를 좋아했던 그는 1943년 “만주의 건국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NHK 구성<金大中自敍傳>, 1999) , 곧 전남기선주식회사 경리담당 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20대로 다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는 한 TV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정상적으로 대학생활을 해보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정도다.(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1997)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탁마했다. 부인 이희호(李姬鎬)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 전의 “그때에도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희호, <나의 사랑 나의 조국>, 1992) 훗날 도합 14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따게 된 것도 학력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다.

세 번째 콤플렉스는 출신 지방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마음은 박정희와 부딪힌다. 대통령 박정희가 “영남민에게 우월감을 부추기고 호남민에게는 열등감을 조장함으로써” “호남사람은 마치 천형의 죄인같이 기피당하고 차별되었다”는 것이다.(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 자유당 때만 하더라도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당선되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1971년 대선을 치르고 난 직후 한 유력 신문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있어 지역감정이 현저히 드러나 경상도는 박정희 후보에 거의 몰표를 던졌고, 호남은 김대중 후보에 다수 표를 던진 것은 우려할 만한 경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5·16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다”는 사설을 싣고 있다.(<동아일보>,1971년 4월 28일)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에는 지역감정 문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글을 통해 보면 김대중 역시 지역감정의 수혜자였음을 알 수 있다. 호남으로부터 다수 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집권층은 역으로 그를 지역 감정의 유발자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남의 몰표를 받는 대가로 타 지역의 표를 받지 못하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역시 지역감정의 피해자였다. 대선 때마다 호남 고립화로 발목이 잡힌 그는 호남 사투리를 교정해보라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한두 번 시도해보았으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투리도 쓰지 말라면 내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하고 거절한 일이 있다.(이희호, <동행>, 2008) 그만큼 지역감정은 그의 마음의 상처였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나는 목포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이 됐고, 이북 출신 며느리를 맞이했다. 또 내가 김해 김씨 후손이니 나야말로 경상도 사람이다”라고 언급한 일도 있다.(<월간조선>, 1980년 6월호)

네 번째는 그를 더욱 곤경으로 몰고 간 레드 콤플렉스다.

김대중과 레드 콤플렉스

 

“일본놈들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뭐라 그랬습니까?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후테이센징이란 개망나니란 뜻 아닙니까?”(<월간조선>, 1985년 4월호) 하고 자신에 대한 용공 낙인을 ‘후테이센징(못된 조선인)’ 에 대비시킨 김대중의 울분을 읽다 보니 일본의 혐한 네티즌이 떠오른다.

일본의 2ch 사이트에 혐한들이 올린 글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날씨만 나빠도 ‘춍’(한국인) 탓이라는 식인데, 이와 비슷하게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욕을 먹던 김대중을 지금도 ‘빨갱이’로 매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 그런 구석이 전혀 없는데 그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새 나라에 대한 희망과 내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장로교 목사 이남규(李南圭)가 1945년 8월 20일 건립한 목포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후 건준 조직이 인민위원회로 탈바꿈하자 이남규는 순수한 뜻이 훼손되었다며 조직을 탈퇴했지만 김대중은 그대로 남았고, 다음해 2월 출범한 신민당(당수 백남운)의 목포지부 조직부장 일을 보다가 1946년 말 그들과 결별했다.

기간은 2년 미만이었지만 이 짧은 좌익활동이 평생 그의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색깔론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대선 때부터였다. “그때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을 맹공하며 현란한 웅변으로 선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에 놀란 박정희 진영은 색깔론으로 김대중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추고, 김일성이 북을치면 김대중이 장단을 맞춘다’면서 김대중을 좌경으로 몰고 갔다.”(김호진, <대통령과 리더십>, 2006)

이때 덧씌워진 용공 혐의는 유신정권이 끝나도 벗겨지지 않았다. 1979년 11월 28일,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는 “김대중은 사상이 좋지 않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고, 그와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전두환(全斗煥)의 신군부도 그를 용공분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받게 했다.

 

그러나 이는 견강부회(far-fetched)였다면서 “80년대 말 미 CIA 출신의 제임스 릴리 주한미대사는 각종 비밀보고서와 경찰자료를 포함한 김대중 관련 기록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특파원은 기록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1998) 그럼에도 그의 용공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1989년 문익환(文益煥)·서경원(徐敬元) 등의 방북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그를 배후인물로 지목하고 용공친북으로 몰아 붙인 것인데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안기부와 검찰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김호진)

1992년 대선 때는 이선실(李善實) 간첩사건을 터뜨려 김대중 부부와 연관을 짓고 “평양방송이 김영삼을 낙선시키고 김대중을 당선시키라는 대남방송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케 했다. 그러나 대선 후 사실 여부를 따진 남궁진(南宮鎭) 의원의 질의에 안기부장은 “북한방송이 선거기간 중 그런 보도를 한 사실은 없다”고 답했다.(<金大中自敍傳>)

1997년 대선 때는 다시 오익제(吳益濟) 사건을 터뜨려 김대중을 용공으로 몰았다. 이때는 북풍이 먹혀들지 않았으나 그는 툭 하면 용공으로 모는 일에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다”면서 “국민들이 김대중이는 과격하다, 용공이다하고 오해할 때는 피눈물이 났습니다”라고 술회했다.(조갑제, <김대중의 정체>, 2006) 용공으로 낙인 찍히는 일이 얼마나 뼈아픈지에 대해 그의 큰아들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빨갱이 새끼’라는 말이 가장 울화가 치밀게 했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김홍일,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 2001)

김대중과 박정희

 

그의 고난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야당 의원으로서 박정희가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찬성해 ‘사쿠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베트남에 파병된 국군장병을 위문하러 가기도 했으며, 미 국무부 초청으로 동료 의원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고난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정치판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54년이었다. 그 해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한 그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제4대 총선 때는 현역이 있는 목포 지역구를 피해 군인 유권자가 80%였던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려고 했다.그러나 자유당 후보가 경찰을 동원해 등록 자체를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보려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사단장의 관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단장은 부재 중이었다. ‘사단장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당번병에게 물어보았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장군님이십니다.’ 그 후 관사를 다시 찾았지만 사단장은 여전히 부재 중이라고 해서 결국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나의 삶 나의 길>)

박정희와의 첫 대면이 이렇게 무산된 것에 대해 김대중은 훗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 만났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그 뒤 치러진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내리 낙선하는 바람에 첫 부인(車容愛)까지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61년 보궐선거에서 겨우 비원을 달성했으나 사흘 뒤 5·16이 나는 바람에 이것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백수 신세로 전락한 그는 부산 피란시절부터 알았던 YWCA전국연합회 총무 이희호와 다시 만나 1962년 5월 재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열흘 만에 전민주당 인사들의 이주당(二主党)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 수감됐다. 첫 아내를 잃으며 4수 만에 확보한 국회의원 자리와 어렵게 시작한 재혼 초(初)를 망친 박정희에 대해 그의 원망은 골수에 사무쳤다.

그런데 다음해인 1963년 2월 중앙정보부의 고모 국장으로부터 “앞으로 중용하고 우대할 테니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응했다면 박정희 쪽에서 일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그 제안을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5대 대선을 앞두고 재건된 민주당(당수 박순천)의 대변인이 되자 박정희를 겨냥했다. 즉 박정희가 현역에서 물러난 뒤 공화당에 입당한 것은 절차상 국가재건특별조치법에 위반되므로 공화당 입당과 대통령 후보등록은 무효라는 지적이었다. 검토해보니 그의 주장이 맞았다. 이에 박정희는 서둘러 특별조치법을 개정토록 했다.

대선 직후 치러진 6대 총선에 당선된 뒤에도 그의 포화는 시종 박정희를 겨냥했다. 김준연(金俊淵)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해 장장 5시간19분에 걸친 의사진행 발언을 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박정희를 겨냥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도 국회에서의 내 활동을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국회라는 단체를 상대해야 했던 그로서는 사사건건 문제점을 짚고 나서는 내가 의식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한 번은 국무총리와 모든 각료들이 내 추궁에 쩔쩔매고 돌아간 뒤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에게 모두가 휘둘렸다고 대통령에게 역정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나의 삶 나의 길>)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7대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는 “김대중의 당선만 막으면 여당 후보가 열 명, 스무 명 떨어져도 상관없어” 하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권노갑,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 1999)

실제 박정희는 목포까지 두 번이나 내려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목포의 개발을 약속하는 등 여당 후보(金炳三)를 적극 지원했으나 종내 김대중을 꺾지 못했다. 그런데다음해 신정(新正)에 김대중이 느닷없이 청와대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것이다. “세배객은 주로 공화당과 정부인사들이었고 그 사이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을 발견한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는 것이다. ‘각하, 목포에서 많은 공약을 약속하셨는데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해주셔야죠?’ ‘합시다. 그렇게 해야죠.’ 흔쾌히 답했는데 실행은 없었다.”(이희호, <동행>) 야당 의원이 갈 자리도 아니었는데 그는 왜 불쑥 청와대 신년 하례식에 참석했던 것일까?

김대중과 우회전략

 

1968년은 김대중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있어 아주 중요한해였다. 이 무렵 그가 최초의 저서로 출간한 <분노의 메아리>에 보면 제1편 제목은 ‘서생적 문제의식’이고 제2편 제목은 ‘상인적 현실감각’이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서생적 문제의식’이 그를 청와대로 향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라이벌인 박정희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직접 말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상인적 현실감각’의 문제가 노정된 것은 그 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통해서였다. 당시 부총재 자리를 놓고 계파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그는 유진오(兪鎭午)-유진산(柳珍山) 라인에 합류했다. 유진산을 밀어주는 대신 원내총무 자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 합류 조건이었다. 이에 따라 총재에 선출된 유진오는 그를 원내총무에 지명했으나 종래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의 견제로 인준이 부결됐다.

충격을 받은 김대중은 “총재님과 지지 의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이 시기에 그가 생각한 것은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제다. 당시 야당은 구파가 주류였다. 신파의 2선 경력으로 구파의 4선 경력을 지닌 김영삼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여기에서 우회전략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그는 “세계 전쟁 사상 정공법으로 돌격해 승리를 거둔 예는 단 1할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승리가 우회전술이나 잠복, 작전상 후퇴 또는 내부교란 등 간접적인 전법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우회전략에 따라 그가 눈을 돌린 것은 원외 세력이었다. 원내총무 자리는 원내 세력에게 좌우되지만 그보다 높은 자리, 곧 대통령 후보 자리는 원외 세력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7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나서자 이에 합류한 김대중은 전국 지구당을 누비며 밑바닥 표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열세인 원내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제2계파의 수장 이재형(李載灐)과 손잡고, 신파의 이철승(李哲承)계에는 “만일 이철승 씨가 지명이 안 되면 나를 도와 달라”는 세컨드 초이스(second choice) 전략을 구사했다.

개표 결과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1위의 과반수 확보 실패에 따라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부인과 함께 지방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을 돌고 난 김대중은 재투표에 들어가기에 전 기자들에게 승리를 장담했다. 그의 말은 적중했다. 결과는 458대410으로 뒤집혔다. 갈채와 함성이 장내에 진동하며 김대중을 축하했다. 김대중에 이어 축하연설에 나선 김영삼은 “김대중 씨의 승리는 나의 승리”라며 김대중으로부터 선대본부장 제의가 올 것을 기대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글을 남겼지만(<김영삼회고록>, 2000)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는 “그때 본진 유세단 일원으로 부산 유세에 갔을 때 (김영삼은) 후보가 아닌 본인의 1975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기에 유진산 총재가 하는 수 없이 2진으로 뺐다는 뒷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동행>)

김대중과 7대 대선

 

여당은 조직이고 야당은 바람이다. 자금과 조직 면에서 우세한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 이론과 정책 면에서 승부를 걸어 이것으로 선거의 주도권을 잡아 야당 바람을 일으킨다는 선거전략은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제 선거에서 부터 김대중을 도왔던 엄창록(嚴昌錄)과 함께 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10월 16일, 김대중은 박정희를 향한 포문을 열고 ①향토예비군 폐지 ②4대국 안전보장론 ③남북교류와 평화통일론 ④대중경제론 등의 메가톤급 포탄을 날렸다. 정부 여당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국민은 호응했다. 여기에 김대중의 사자후가 유권자들 사이에 불고 있는 선풍을 태풍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1971년 1월 23일 그는 연두기자회견에서 “대중반정을 실현하자”고 외쳤다. 대중반정(大衆反正)은 그의 이름을 딴 대중반정(大中反正)도 되기 때문에 시중에 화제가 되었다. 회견을 마친 뒤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직후인 설날 밤 동교동 집 마당에서 원인 모를 폭발물이 터졌다. 경찰은 사건을 수사한다며 그의 조직 총책인 엄창록을 연행해갔다.

본래 함경도 원산 출신인 그는 김대중에 대한 지역적 연고는 없었다. 몸이 약했던 그가 여당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자 “내게는 큰 타격이었다. 참으로 아쉬웠다. 엄창록은 선거의 귀재였다. 선거판세를 정확히 읽고 대중심리를 꿰뚫는 능력을 지녔다”고 김대중은 훗날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다.(<김대중자서전>, 2010)

저쪽으로 넘어간 1970년대의 제갈공명은 “김대중에게 승리하려면 지역감정을 자극하라”고 여당 캠프에 귀띔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공화당의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전국을 누빈 김대중의 유세장에는 그의 말솜씨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청중이 몰려들곤 했다. 결정판은 선거를 사흘 앞둔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유세였다.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인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고 경고했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심의 바다에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634만 표, 김대중 539만 표였다.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총동원하고도 김대중 하나를 간신히 이긴 박정희는 선거 다음 날 “내가 골똘히 생각해봤는데 이거 안 되겠어” 하고 김종필(金鍾泌)에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김종필이 “뭐가 안 되겠습니까?” 하자 박정희는 “나는 빈곤을 추방하려고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이 사람(김대중)을 놓고 국민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 고작 이것뿐이야” 하며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2004)

그 다른 생각이 ‘10월 유신’의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년 반 뒤다. 후폭풍은 김대중 쪽에도 있었다. 포석의 문제였다. 선거기간에 내놓았던 정책들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향토예비군 폐지-4대국 보장론-남북교류는 군(軍)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고, 대중경제론은 대기업→재계를 그의 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해 말 8대 국회에 등원해 그가 중앙정보부를 집중공격한 일은 수사기관→관(官)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군-관-재계는 군사정권을 받쳐주는 3대 기둥이었다.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은 어떤 특정인의 미움을 샀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집단이기 때문에 거부감은그 특정인이 사라져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일생 동안 가장 높고 뾰족한 가시를 찾아 헤맨다는 그의 ‘가시나무새’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반(反)유신 투쟁

 

정권 차원에서도 박정희의 대안, 곧 ‘포스트 박’으로 국민에게 인식된 김대중의 이미지를 다운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중앙정보부였고 완성시킨 것은 안기부였다. “끊임없이 반복하면 네모도 원이 된다”는 괴벨스(Goebbels)의 선전술을 원용해 그들이 만들어낸 김대중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격하고-폭력적이고-선동적인)용공이고, 다른 하나는 (임기응변에 능하고-신의가 없으며-기회주의적이고-정략적이며-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교활간교한 인간상이었다.(조갑제)

 

이미지에 역사성은 없다. 일단 형성되면 출처는 사라지고 그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5공 초에 쓰여진 신문기사를 하나 소개한다.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지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화신’ 바로 그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인격과 위선에 가득 찬 그의 인생 경로는…”라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경향신문>, 1980년 9월 11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라도 싫어할 만한 이미지의 소유자가 되어가던 김대중은 대선 직후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러 일본에 건너갔다가 ‘유신’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갖고 “이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라고 박정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 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反)유신운동을 펴나갔다. “정적인 김대중이 가까운 일본에서 반유신세력을 키워간다는 것은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유신을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자신의 후계문제에서나 체제안정을 위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론은 쉽게 난 듯했다.

1973년 8월 8일 오전 10시경, 일본 동경 팰리스호텔에 체류하던 김대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주돈식) 납치사건이었다. 중정 요원들에게 끌려 강제 귀국하게 된 김대중이 초췌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니 “여당은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김대중의 자작극이다.’ 그보다 더욱 기막힌 것은 야당이었다. 유진산 총재도 그렇게 믿었으며 채문식 대변인도 동조했다.”(<동행>) 그만큼 정국이 경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치를 하고 싶어도 박정희는 그의 제도권 진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여기에서 그는 원외재야세력에 눈을 돌리게되었다. 비주류 출신의 그에게 우회전략은 낯설지 않았다.그는 1974년 11월27일 정계·종교계·학계·언론인·법조인·문인·여성계 등의 재야인사 71명과 연대해 반(反)유신운동을 위한 ‘민주회복국민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낭독한 것은 이우정(李愚貞)이었지만 선언문을 기초한 것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수감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9년 3월 4일, 윤보선 자택에서 재야세력의 연합체인 ‘국민연합’을 구성하고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3인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중도통합의 이철승대신 선명노선의 김영삼이 총재가 될수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었다.민주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제도권 밖에서 재야세력과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얻은 실리는 명분의 선점이었다. ‘민주화’의 명분이야말로 그에게 덧씌워진 이념과 지역성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명분이나 사명감은 그 진정성을 인정받는 시점부터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생긴다.

김대중과 서울의 봄

 

10·26으로 유신체제가 사라진 뒤 제도권 밖의 시선은 민주화의 명분을 선점한 김대중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실력자로 등장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그의 가택연금 해제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대중은 용공”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를 용공으로 몬 것은 12·12쿠데타로 정승화를 제거한 신군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정착된 이미지는 바꾸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1980년 3월 1일을 기해 사면복권되자 그는 재야 13개 단체를 이끄는 ‘국민연합’에 복귀해 조직을 개편하고 대권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재야의 생각은 민주화 투쟁을 해온 자기들이 새 시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주도권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사회에서의 경쟁은 당연한 것이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신군부는 제도권 밖의 김대중과 제도권 안의 김영삼 간에 벌어지는 ‘양김 경쟁’을 구실로 5·17정변을 단행했다. 그들은 당일로 김대중을 구속했고, 김영삼은 앞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 날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에 자택에 연금시켰다. 이처럼 제도권 안과 밖의 처우가 달랐다. 이희호는 “김대중은 재야와 감옥에서, 김영삼은 제도권과 집에서 독재와 투쟁했다. 동교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 상도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존방식을 고민했다”고 회고했다.(<동행>)

시도 때도 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중앙정보부의 지하 취조실에서 그는 2달 만에 신문을 얻어 보게 되었다. “5월 17일 중앙정보부에 들어간 내가 5월 18일 (광주)사태를 조정했더란 말이에요. 홍길동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 짓은 못할 거예요.”(김진배, <인동초의 새벽>,1987)

 

그는 결국 국가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 수괴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광주사태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선동한 국가내란음모죄의 최고형은 무기징역이었기 때문에 신군부는 그가 의장에 취임하지도 않았던 일본 ‘한민통’의 문제를 끌어들였다. 반국가단체 수괴죄의 최고형은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은 EU 가맹국들이 한국 정부에 공동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미 국무부는 “극형이 내려진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다”면서 김대중에게 씌워진 혐의는 ‘far-fetched’, 곧 견강부회였다는 성명을 공식발표했다.그의 구명을 위해 전두환과 협상을 벌인 것은 레이건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앨런이었다. “앨런은 김대중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백악관 방문과 양국관계 정상화를 약속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레이건 취임식 다음 날인 1981년 1월 21일 백악관은 전두환의 방미(訪美)가 곧 이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전두환은 계엄령을 해제하고 김대중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했다.”(돈 오버도퍼) 그 후 석방돼 미국에 망명했던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 투쟁 뉴스를 접하자 1000여 명의 교포와 함께 워싱턴과 뉴욕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1984년 5월 18일 민추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총선을 4일 앞둔 1985년 2월 8일이었다. 군사정권의 암살기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떠돌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에드워드 페이건, 토머스 포글리에타 하원의원 등 미국 인사들이 동반 귀국했다.

 

김대중과 직선제 개헌

 

바람을 몰고 온 그의 존재는 12대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쳐 양김이 동등한 지분으로 창당한 신민당(총재 이민우)이 제1야당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양김은 총선 1주년인 1986년 2월 12일을 기해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김대중이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합시다” 하고 제안하자 김영삼은 “백만이 뭐꼬? 천만은 돼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김대중이 정색을 하며 “우리나라 인구가 몇인데 천만 서명을 받는단 말이오?”라고 반문하자 김영삼은 “그걸 누가 세어보나? 일단 하고 보는 거지” 라고 했다. 이에 김대중도 웃으며 화답해 천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그분은 대단히 어려운 일도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다”고 김영삼을 평했고, 김영삼은 “그분은 아주 간단한 일도 대단히 복잡하게 설명한다”고 김대중을 평했다.

 

이 시기 두 라이벌은 굳게 단결해 있었다. 아직은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거리에는 최루탄 가스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싸움을 외신들은 ‘마주 달리는 열차’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부터 대대적인 공안 탄압이 시작됐다.

이 와중에 김대중은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자 서독을 방문 중이던 김영삼은 “김대중씨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나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러던 두 사람 사이에 분열이 온 것은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기로 한 뒤부터였다. 6·29선언 이후 사면복권이 된 김대중이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전두환 씨가 직선제 제안을 수락하고 건국대 사태 관련 학생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면 안 나갈 수 있다고 한것인데, 상대방이 이를 거절했으므로 무효”라고 해명했다. 언론은 그 해명이 “논리상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논평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대선 후보를 양보하겠다던 김영삼의 말을 식언이라고 꼬집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김은 결국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그 책임은 김대중에게로 돌아갔다. 당시 김대중 계보였던 한 중진은 “나는 양김 중 누가 먼저 되든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YS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양순직,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 2002) 당시 이 같은 생각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고난을 더 겪은 김대중쪽에서 보자면 억울했겠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양보하면 5년 뒤에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막은 것은 1971년에 얻었던 540만 표의 환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4자 필승론’의 논리를 내세우며 출마했으나 결과는 1위 노태우(盧泰愚), 2위 김영삼, 3위 김대중, 4위 김종필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국민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민심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그는 뒤에 회고했다.(<김대중자서전>)

13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재야인사 91명을 평민당에 대거 영입, 전열을 가다듬었다. 대선에 실패한 김영삼은 야권단일화를 위해 통일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며 김대중을 압박했다. 김대중도 그의 요구에 응해 평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양당의 통합 협상은 파행으로 끝났다. 결국 김영삼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평민당은 후보들을 독자 출마시켰다. 결과는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김종필) 35석으로 나타났다.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김대중과 정계 은퇴

 

주적 개념이 분명한 군인 출신의 전두환이 노태우의 최측근인 박철언(朴哲彦)에게 “이제는 DJ와 싸워야 한다” 고 충고했던 것처럼 6공 초 정국 운영의 열쇠를 쥔 것은 사실상 제1야당의 총재가 된 김대중이었다. 5공 비리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그는 김영삼·김종필과 공조했지만 노태우와도 협조할 것은 협조했다. 그래서 귀양을 갔던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을때 서울 귀환을 승낙해준 것도, 김영삼이 제기한 중간평가의 문제를 ‘유보’할 수 있도록 승낙해준 것도 그였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란 결국 국민투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야당이 국민투표에서 성공한 사례도 없을 뿐 아니라 제1야당 총재로 사실상 정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그로서는 ‘황금분할’의 4당체제를 깨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중간평가가 유보되자 김영삼은 불과 보름 전에 합의한 야3당 공조 합의를 깼다면서 김대중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로서는 김대중과 노태우의 밀월관계를 이대로 놔둔다면 자신의 입지가 없어진다는 위기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노정권 퇴진운동을 전개하겠다”며 극한투쟁을 선언했으나 ‘1노3김’이 ‘3노1김’로 바뀐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익환→서경원→임수경(林秀卿)→문규현(文奎鉉) 등의 밀입북사건이 잇달아 터져 공안정국하의 김대중이 코너로 몰리면서 김영삼은 보수노선의 노태우-김종필과 가까워졌고, 이를 계기로 3당 합당에 합의하게 됐다. 1990년 1월 22일 새 여당의 이름은 민자당으로 발표됐다. 이로써 ‘3노1김(영삼)’의 정국은 ‘3노1김(대중)’의 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김대중은 “야합”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1989년 말 합당 제안을 받은 일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노태우 씨의 제안을 받고 그저 어안이 벙벙할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킨 뒤 ‘그건 안 될 말’이라고 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216석의 비호남 여당이 70석의 호남 야당을 포위한 형국이 되자 그는 지방자치제를 관철하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그 해 말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 8일째 탈수현상이 심해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을 때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김영삼이 찾아왔다. “대화 중에 김 대표는 엉뚱한 말을 했다. 자신이 여당에 들어간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민주주의와 가장 먼 곳으로 가서 무슨 민주주의란 말이오.’ 그러면서 지방자치제는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김대중자서전>)

단식투쟁 13일 만에 민자당으로부터 1991년 상반기에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 단식을 중단했다. 이 합의에 따라 지방의회 선거는 30년 만인 1991년 3월과 6월 두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 결과 둘다 민자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김대중 또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인재양성과 지자체 공천을 통해 정치자금 확보의 외연을 넓혔기 때문이다. 다음해 그는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14대 총선에 임했다. 결과는 민주당 약진(97석), 국민당 돌풍(31석), 민자당 참패(149석)으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좀 더 우경화한 ‘뉴DJ플랜’을 가지고 1992년 말 대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여당은 전통적인 색깔론(이선실간첩단 사건)과 지역감정(초원복집 사건)으로 그를 함락시켰다. 보수세력의 벽이 얼마나 높은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한 그는 선거 패배 다음 날“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때그의 실제 나이 69세였다.

김대중과 15대 대선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 언론은 나에 관한 기사를 무더기로 쏟아냈다. ‘정치거인’ ‘정치거목’…. 선거기간 내내 그토록 모질고 야속하게 굴었던 언론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나를 영웅으로 띄워 올렸다.”(<김대중자서전>) 1993년 1월 26일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초 미국에 가려다가 영국으로 행선지를 바꾼 것은 “조금이라도 더 국내 정치와 떨어져 있으려 함이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내가 그의 부정한 과거를 수사할까 봐 두려워서 영국으로 떠난 것”이라고 말했다.

 

민추협 시대까지만 해도 김영삼은 “내가 김대중 씨를 새삼 존경하는 것은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는데도 좌절하지 않고 이 시점까지 용기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참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덕담을 하곤 했으나 이 무렵부터는 “나와 국민은 김대중씨에게 또 한 번 속았다. 국민 앞에 눈물을 흘리며 정계 은퇴를 약속하고 1993년 1월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 씨는 6개월쯤 지난 뒤 슬그머니 귀국했다”는 식으로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김영삼대통령회고록>, 2001)

그러나 김대중은 맞대응하지 않았다. 지난날 첫 번째 라이벌인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토록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던 그였지만 두 번째 라이벌인 김영삼에 대해서는 귀국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면서도 그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다만 대외정책 면에서, 가령 1994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 때 그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건의해 위기 해소에 일조한 일이 있는데 김영삼에게는 그 일 자체가 불쾌했던 것 같다.

그가 조금만 색다른 행보를 해도 의심의 눈길이 번득였다. “은퇴를 선언했으면 뒤에 물러서 있을 일이고 복귀를 하려면 당당하게 선언할 것이지 김대중 씨는 은퇴다 아니다, 복귀다 아니다, 당원 자격이다 아니다 등등의 말장난을 계속했다”고 김영삼은 비난했다.(<김영삼대통령회고록>)

영어로 악의 있는 거짓말은 lie, 악의 없는 거짓말은 fib이라고 한다. 김대중의 거짓말은 상황에 몰려 방어적으로 하게 된 일종의 ‘fib’ 같은 것이 많다. 지자체 선거에서의 훈수를 시작으로 의혹이 커지자 그는 fib의 연막을 걷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로써 정계 복귀가 확인되자 엄청난 비난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십자포화를 맞으면서도 그는 1996년 총선에서 자신이 만든 ‘국민회의’를 제1야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발판으로 다음해 제15대 대선에 다시 출마하자 ‘대통령병 환자’라는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지지도는 바닥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느냐 하면 여당에서 ‘9룡’이 대선 후보로 난립할 정도였다. 누가 나와도 김대중은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이에 반해 여당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李會昌)의 지지도는 그 해 7월 말 50.3%까지 치솟았다.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진영에서 그의 두 아들 병역비리 문제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지지도는 10%대까지 폭락했다. 이렇게 되자 경선 2위였던 이인제(李仁濟)가 탈당해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김영삼의 민주계 지지를 받고 있던 그는 나중에 드러난 것이지만 여당 성향의 표를 무려 500만 표나 끌고 나갔던 셈이다. 김대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호남고립화로 발목이 잡히곤 했던 그는 역으로 영남고립화를 추구했다. 그것이 이강래(李康來)의 아이디어였던 것(신동준, <대통령의 승부수>, 2009)으로 알려진 DJP(김대중-김종필)→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연합이다.

 

선기 기간 중 여당은 그를 향해 비자금 폭로(강삼재·이사철·송훈석·정형근), 북풍(오익제), 건강(고혈압·당뇨·치매) 등 전통적인 포탄을 잇달아 발사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IMF 외환위기를 맞은 유권자들은 ‘준비된 대통령’ ‘경제 대통령’의 선거구호를 앞세운 김대중을 15대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같이 출마했던 이인제는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호남이 정치의 중심축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고 김대중에게 말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김대중과 IMF

 

그는 매우 어려운 때에 국정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경술국치 이래의 국치이며 한국전쟁 이래의 참사”(강만길,<20세기 우리역사>, 1999) 였던 IMF 외환위기는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위기와 혼란에 빠진 국민은 당선자김대중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당선일부터 취임일까지 두 달 동안 사실상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 라이벌인 김영삼은 아직 현직 대통령이었지만 완전한 레임덕에 빠져 있었다.

그가 “한 소비자단체에서 우리나라는 연간 60억 달러의 금을 수입하는데 상당 부분 금고에 쌓여 있으니 금모으기운동을 하여 내다 팔면 달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이 아이디어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금 모으기운동으로 발전했다. 국민의 반향은 엄청났다. 시민단체와 방송사들이 참여하면서 무려 350만 명이 226톤의 금을 내놓았다. 당시 시세로는 21억5000만 달러어치였다. “빈사 직전의 나라에 백성들이 수혈을 했다. 그 효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 세계가 감동해 한국을 돕자는 기운이 일어났다. 한국의 이미지가 새로워지고 대외신인도에도 효과가 미쳤다. 금모으기운동 소식은 전파를 타고 지구촌에 퍼졌다. 세계가 한국의 미래를 믿기 시작했다.”(<김대중자서전>)

취임 전의 그가 월스트리트 헤지펀드의 대부로 통하는 조지 소로스를 일산 자택으로 초대해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기조로 설정하겠다고 천명했다. 취임하던 날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축하인사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미국 협상단을 보낼 테니 IMF와의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나는 솔직히 클린턴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당선자와의 첫 통화인데 무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란 나라 전체가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김대중자서전>)

 

클린턴과 대화가 끝나자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의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최대의 국난을 맞은 한국을 도와 달라고 했고 하시모토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상황은 극도로 나빴다. 1998년 1월 한 달에만 300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도산했고 산업시설의 가동률은 65%에 불과했으며 실업률은 2배로 늘어나는 등 당시 통계청이 밝힌 경제위기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경제사령탑인 재무장관과 금융감독위원장에 이규성(李揆成)과 이헌재(李憲宰)를 각 각 임명한 뒤 금융·재벌·노동·공공의 4대 개혁을 진행하도록 주문했다. 그와 일면식도 없었던 그들은 DJP연합의 한 축을 이룬 자민련 쪽에서 추천한 인사들이었다. 재벌들의 저항이 거셌다. 구조조정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개혁의 시늉만 내고 있다는 여론이 외국에서조차 비등했다.

IMF 경제위기의 본질은 국제 유동성 위기였다. 그와 ‘국민의 정부’는 156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 33개 은행 중 5개 은행, 30개 종합금융회사 중 16개사를 정리· 폐쇄하고 재벌들에게 부채 축소 등 경영 개선을 명령하는 한편 업종 재편성의 ‘빅딜’을 권장했다. 그간의 무분별한 중복투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업 간 빅딜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채가 많았던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되었고, 제일은행은 외자에 매각되었으며, 삼성그룹은 빅딜 포기를 선언하고 문제가 된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렇게 해서 재벌 해체가 시작되었다.

 

김영삼은 하나회의 영남 군벌을 제거하고 김대중은 재벌을 부분 해체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유산을 청산하게 되었다. 개혁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IMF의 개선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결과 해외의 불안이 서서히 해소됐다. 거기에다 공적자금의 대거 투입을 통한 경기부양과 금융과 기업의 구조 개혁에 힘입어 경상수지 적자는 1998년부터 흑자로 전환됐다. 1998년 -6.7%까지 침체했던 경제 성장률은 1999년 10.7%로 회복됐다. 주식시장도 활성화되어 1999년에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김대중과 IT산업

 

그의 세 번째 라이벌은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드는 꿈이 었다. 이를 위해 그는 팔을 걷어붙였다. 경제위기를 만나 가장 피해를 크게 받은 것이 저소득층이었다. 그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이들을 끌어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생산적 복지란 사회적 약자를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일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복지를 제공한다는 개념이다. 현재 한국 복지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통합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 확대 등은 다 이때 마련된 것이다. 사회안전망의 기반 확충을 위해 3년 동안 그가 투입한 돈은 20조원에 달했다.

또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사상 처음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개혁은 교육 분야에도 미쳤다. 한 진보적 학자는 “그때 교육정책에 대해 이해찬 세대라느니 하면서 트집을 잡았습니다만 당시의 의도는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할 수 있게 한다는 거였잖아요. 박찬호, 박세리가 공부 잘해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느냐면서 특기와 적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교육 예산을 늘렸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한홍구, <지금 이 순간의 역사>, 2010)

교원정년 인하를 단행한 것도 이 시절이었고, 시차를 두고 진행되기는 했지만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확대, 단일 건강보험제·의약분업제 실시, 국민연금 확대 등을 실시한 것도 다 그의 집권 시절의 일이었다. “이제 아랫목은 좀 따스해졌는데 얼마 있으면 윗목도 따스해지도록 하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이때만 해도 의욕이 넘쳤다. 특기할 만한 것은 IT산업에 대한 것이었다. 연로한 나이였음에도 독서량이 남달랐던 그는 새 지식을 흡수하는 마음, 특히 정보화에 대한 자세가 남달랐다. 그래서 취임 전부터 세계적 석학인 앨빈 토플러에게 이문제를 상의해보기도 했다.

 

그는 이미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다”면서 “산업화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당시 언론은 그것이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립서비스의 하나인 줄 알고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나라가 부도났는데 무슨 컴퓨터 세계 제일이냐?”고 비웃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취임 후 상당한 예산을 확보해 그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빌 게이츠나 손정의(孫正義)가 “인터넷은 스피드입니다. 학생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라고 한 조언 등을 염두에 두었다가 정보 고속도로가 개통될 때 전국 초·중등학교에 초고속 인터넷을 깔게 했다. 그리고 교원 33만명에게 PC를 보급하고 가난한 학생 50만 명에게 컴퓨터 무료교육을 실시했다.

그 후 서울에서 ASEM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프랑스나 영국 지도자들이 자국의 인터넷 인구가 600만이네, 700만이네 하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김대중은 그들 앞에서 차마 자랑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구가 그 무렵 이미 17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자정부 구현과 더불어 IT를 전통 산업에 접목하도록 주문했다.

 

한 번은 미국에서 한국 철강과 조선업체가 덤핑수출을 한다고 WTO에 제소해 국제조사단이 한국에 와서 현장을 조사했다. 그 결과 업체마다 IT를 접목해 생산원가를 낮추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사단은 감탄하고 돌아갔다. 노르웨이의 한 인사는 한국 조선업계를 둘러보고 “노르웨이는 아직 망치로 못을 두들기는데 한국은 IT가 생산라인을 지배하니 우리는 이제 끝났구나 생각했다”면서 김대중에게 절망감을 토로했다고한다. 이처럼 한국을 IT강국으로 올려놓은것은 확실히 그의 공이었다고 할 수있다.

김대중과 동진정책

 

어느 정도 경제위기가 진정되자 김대중은 1999년 말 각계 대표 12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우리는 경제위기를 완전히 극복했습니다. 나는 고통스러운 구조개혁을 위해 애쓰시고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성공적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노력해오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또한 축하 드립니다”라고 말한 뒤 ‘IMF 졸업파티’의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조선일보>, 1999년 12월 13일)

개혁으로 대기업의 부채 규모가 줄어들고 지배구조가 개선되며 경영 투명성이 높아지는 등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2년 뒤에는 IMF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자기들이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 평가가 아니었겠느냐면서 “신속한 경제회복은 김대중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착각에 빠지게 했다. 경제개혁이 절실하다는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김대중 자신도 경제개혁에 대한 의지가 약화되었다” 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이도 많았다.(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2006)

 

실제로 그가 IMF 졸업을 서둘러 선언한 것은 다음 총선을 겨냥한 정치적 포석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를 위해 종래의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개편해 전국 정당화를 지향했던 것이 사실이다. 뒷심을 얻어 자신의 꿈,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드는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제16대 총선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물론 민주당은 전보다 30석을 더 얻어 종래의 호남당에서 처음으로 전국 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DJP연합의 자민련이 교섭단체 등록에도 못 미치는 17석에 그침에 따라 여권 전체의 수는 전보다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호남인들의 불평을 들어가면서까지 영남 우대의 동진정책(東進政策)을 펴온 그로서는 회심의 카드였던 김중권(金重權)·김정길(金正吉)·노무현(盧武鉉) 등의 영남 장수들이 모두 낙마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번 총선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지난 2년 동안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이것을 국민이 평가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민심을 읽는 데 또 실패했다.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니 참담했다.”(<김대중자서전>)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가는 이 시점에 여소야대의 ‘험난한 앞길’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랬다. 여소야대 가 된 국회뿐만이 아니었다. 보수세력이 다수인 이 사회에서 그는 출범 초부터 국정을 효과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충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군부, 재계, 관계, 언론 등은 여전히 그의 우호세력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치 9단’이었던 그가 통치도 ‘9단’이었다면 절대로 ‘IMF 졸업파티’를 서둘지 않고 그 상태를 임기 말까지 끌고 나갔을 것이라고 본 정치전략가도 있었다. 그에게 비우호적인 세력들이 고개를 숙였던 것은 그의 리더십이나 권위에 굴복했던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도 연루된 국난에의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통치 9단’이 아니었다. 실제론 행정 경험이 전무한 ‘통치 초보’였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IMF 졸업’을 선언한 것이 그만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선언에 따라 비우호적인 세력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가 설치하느라고 애쓴 사회안전망은 개혁의 아픔을 치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의 지지세력인 노동계조차 “경제위기가 끝났다니 노동자의 희생도 끝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사회 구석구석에서 반발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지만 아직은 IMF 환란의 메가톤급 폭탄을 맞은 충격이 남아 있었고, 환란을 극복해낸 김대중의 리더십에 대한 존경심도 일부 작용하고 있어 본격적인 반발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김대중과 햇볕정책

 

2000년 6월 13일, 김대중은 평양에 도착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나는 마침내 트랩 위에 섰다. 하늘과 주위를 살펴보았다. 북한의 조국강산을 처음 보는 심정은 감개무량했다. 참으로 형언키 어려웠다. 순간임에도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북녘 하늘과 땅 사이에 대한민국 대통령, 내가 있었다.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꽃술을 흔드는 군중이 보이고, 그들이 외치는 함성이 들렸다. 공항 청사에는 김일성 주석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저 아래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이 있었다.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위원장, 그가 마중을 나왔다. 트랩을 내려갔다.”(<김대중자서전>)

반 세기에 걸친 첨예한 대립 끝에 남북 정상의 만남이 막실현되려는 찰나였다. 이날 두 정상의 극적인 만남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두 정상의 대담 내용이 김대중을 따라간 한국 기자들에 의해 방송과 신문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특히 김정일이 회담 도중에 “구라파 사람들은 나보고 은둔생활을 하느냐고 그러는데… 그동안 비공개로 많이 갔다 왔어요. 김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고 그래요”라고 한 파격 유머가 남한 시민들을 크게 웃기면서 ‘뿔난 괴물’의 김정일 이미지가 순식간에 불식되었다. 이와 함께 북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사라지고 그가 쓰고 있던 색안경이 유행될 정도로 북한 열풍이 불기도 했다. 이때가 김대중에게는 득의의 절정이었다.

인기가 급등했다.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그간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 간 냉전 기류를 어느 정도 녹아 내리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은 그가 가장 이루고 싶었던 꿈 중 하나기도 했다. “강한 바람은 사람의 옷을 여미게 할 뿐이지만 햇볕은 두껍게 껴입은 옷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다”는 뜻에서 ‘햇볕정책’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3단계 통일론(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은 기본적으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추진했던 ‘선평화 후통일’의 동방정책과 기조를 같이한 것이다. 동방정책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햇볕정책이 분단을 제거하는 평화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기대치도 한껏 높아졌다.

6·15남북공동선언에 따라 이후의 남북관계에는 지난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장관급 회담이 정례화되어 남북 간 제반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고 경제협력 강화,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간 교류와 협력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의 햇볕정책은 한동안 김대중의 위대한 역사적 유산이 될 것 같기도 했다.”(김충남)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뒤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긴장완화의 구체적 성과는 없었다.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경의선 복구공사도 한국 측은 완성했지만 북쪽은 미착공이었다. 이산가족 재회도 100인씩 4회로 끝나고 말았다. 금강산 관광은 적자투성이로 주관사인 현대그룹의 경영위기를 불렀다. 정부는 현대그룹을 지원, 금강산 관광사업을 국영 관광공사가 인수했지만 이는 정경분리 정책의 위반이며, 정경유착의 전형, 특혜라는 비판을 낳았다.”(池東旭, <韓國大統領列伝>, 東京, 2002)

보수세력이 가장 불만스러워했던 것은 햇볕정책이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벗겨버렸다는 점이다. 외투를 벗겼다지 만 실은 내 외투를 벗어 놓고 저쪽 외투를 벗겼다고 착각하는 것아니냐는 것이었다. 야당은 김대중 정권이 ‘햇볕정책’ 아닌 ‘퍼주기 정책’으로 북한의 전력만 강화시켜준 것이라고 비난했고, 남북정상회담도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사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냐며 로비설까지 흘렸다. 재미있는 것은 IMF사태 이후 숨을 죽이고 있던 라이벌 김영삼이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김대중을 비판하고 나선 일이었다.

김대중과 월드컵

 

때리는 시어미(한나라당)보다 말리는 시누이(언론)가 더 미웠던 것일까? 김대중은 이들을 손보기 위해 2001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세무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하면서(성한용, , 2001) 이는 “언론개혁”의 차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언론탄압”이라고 맞섰다. 이에 진보단체들은 해당 언론사들을 독재정권과 유착했던 ‘족벌언론’이라고 매도했고, 해당 언론사들은 이들 진보단체를 ‘홍위병’이라고 몰아붙였다. 싸움이 중국의 작은 문화혁명처럼 번져나가자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노무현이 “언론과의 전쟁선포도 불사해야 한다. 언론과 맞붙어 싸울 수있는 기개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끼어들어 세간에 파문을일으켰다.

노무현은 이 발언으로 보수 언론의 적이 되었지만 반대로 보수 언론에 심기가 몹시 상해 있던 김대중의 낙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배짱 있는 발언을 한 노무현 주변으로 당 안팎의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산 출신으로 호남 정당에서 이렇다 할 기반을 갖고 있지못했던 노무현은 언론과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오히려 지지 기반(→노사모)을 확보하게 되었으니 사람 팔자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의도하지 않은 정치동력을 노무현이 확보한 것과는 반대로 세무조사를 시켰던 김대중은 이 작업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악재는 겹쳐서 오기 마련이다. 김대중이 방미 중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로부터 “this man(이 사람)…”이란 호칭을 듣자 보수 언론들은 이를 계기로 김대중의 대북 비밀 협상을 문제 삼았다. 게다가 김대중의 측근들이 연루된 진승현·정현준·이용호·윤태식등의 게이트와 아들 비리가 불거져나오자 이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 대선 후보로 김대중의 후원을 받아 오던 이인제는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까봐 ‘김대중과의 차별화’를 언급했는데 이것이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었다. 실책이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이 이인제의 대항마로 급부상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2002년 3월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 후보 광주지역 국민경선에서 뜻밖에도 1등을 했다. 당시 당원들의 지지도는 이인제가 앞섰으나 노무현은 국민경선에 참여한 광주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돌풍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김대중→김홍일이 30만 회원의 ‘연청’ 조직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는 영남 후보를 통해 영·호남 간 갈등을 치유해보자는 호남 유권자들의 바람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경선 도중 이인제가 ‘청와대 음모론’을 거론하며 나머지 지역경선을 포기하는 바람에 노무현의 후보 당선은 도중에 확정되고 말았다.

 

이 무렵 아들들의 비리문제가 도하 신문에 도배질되기 시작했다. “2002년 봄은 잔인했다”고 김대중은 술회했다.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세운 아태평화재단이 도마에 올랐다. 평화를 위해 세운 재단이 비리의 온상처럼 연일 보도되었고 임원 한 명이 구속되었다. 거기에 둘째 아들 홍업과 막내 홍걸에 대한 비리연루 의혹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었다.”(<김대중자서전>) 그는 아들들의 잘못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 때문에 재임 기간 중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뻐했어야 할 행사의 하나였던 2002년 5월 말의 월드컵대회가 그에게는 가장 ‘아픈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김대중과 후계자

 

이 무렵 언론들은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그 해 6월 말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보수 언론은 일제히 김대중의 대북외교 성과를 폄훼하기 시작했다. 소수 정권으로서 언론과 척진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무슨 일만 하면 공격을 받았다. 물론 그 자신은 임기 말까지 “국정의 책임자로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하지만 사실상 레임덕이었다. 여소야대에 언론마저 등을 돌린 구조에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임기 내내 이 불안정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당선자 시절 그는 일산 자택에서 청와대로 발길을 돌리면서 “지금 청와대로 가는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5년 후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때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꿈은 이루어졌을까? 임기 중 그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복지체제의 바탕을 설계한 공을 세웠다. 인권 수준을 향상시킨 것도 그의 공이다. 집권 후 평소 약속대로 정치 보복을 하지 않은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는 모두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그가 꿈꾸었던 주변부의 중심부화 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피로를 빨리 느껴 재벌과 금융 개혁을 기대만큼 하지 못한 점이나 섣부른 규제 완화로 신용카드 위기를 방조해 다음 정권에서 서민들이 카드대란으로 고통받고, 아파트상한제를 철폐함으로써 서민들이 다음 정권에서 폭등한 집값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임기 말 ‘대북송금사건’이 터지면서 남북정상회담조차 돈 주고 샀다는 식으로 그의 국정 브랜드인 햇볕정책이 폄훼되기에 이르렀다.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동진정책을 쓰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역대립이 전보다 심화되었다.

이렇게 열거하다 보니 그는 실패한 대통령처럼 보인다. 그러나 임기 중 그가 이룰 수 있었던 큰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후계자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본 일이었다. 그는 “내가 다하지 못한 일들은 노무현 차기 대통령이 맡아서 잘할 것”이라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그에게는 극복하고 싶었던 라이벌이 셋 있었다.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들겠다는 꿈도 그 중 하나였다. 노무현에게 계승함으로써 극복의 길은 열어둔 셈이 되었다.

 

2004년 박근혜(朴槿惠)가 찾아와서 아버지의 일을 사과하자 그는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고 말했다. 또 다른 라이벌인 김영삼과는 병석에 누워 있을 때 간접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희한한 일이다. ‘인동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어려움이 많았던 그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은 죄다 이루었다. 평생의 라이벌들도 극복했고, 대통령도 되었고, 남북정상회담도 했고, 노벨상도 탔고, (명예)박사도 14개나 땄고, 저서도 24권이나 냈다.

돌이켜보면 좋은 의미든 아니든 그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반 세기 이상 큰 소란을 피우다가 간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명했을 때 “큰 별이 졌다”고들 했는데 과연 그가 없는 세상은 많이 조용하다. 슬하에 3남을 두었던 그가 누린 해는 86년이었다.

■강준식 :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자료 : 월간조선(강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