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와 욕망의 차이?
우연히 오쇼 라즈니쉬의 잠언집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책을 보다가 이런 글을 읽었다. (이 책은 재작년 군 입대하기 전 여행 다니면서 화엄사에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책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한번 읽고 싶어서 작년에 샀는데 아직 못 읽고 있었다. 몸, 사랑, 성에 대한 잠언집이다.)
욕망 Desires
모든 욕망은 건전치 못하다. 욕망 자체가 건전치 못한 것이다. 욕망은 미래에 사는 걸 뜻하는데, 미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한다. 욕망은 그대를 지금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욕망이란 내일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 그대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존재하지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 ...
버려야 할 최후의 욕망은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다. 모든 에너지는 돈, 권력, 특권 등 온갖 다른 욕망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것이 깨달음에 대한 욕망으로 집중되는데, 이는 다른 어떤 욕망보다도 그대를 구속한다. 다른 욕망들은 분리되어 있다. 즉 수백만 가지의 욕망이 있어서 그대의 에너지는 잘게 나뉘어지지만, 깨달음에 대한 욕망은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그 속에 쏟아붓게 한다. 그 욕망은 그대를 옭아매는 가장 굵고 강한 사슬이라서 가장 마지막에 제거되는 욕망이다.
내 머리 속은 온통 욕(欲)으로 가득차 있는데,,, 나는 건전치 못한 놈인가? 나는 미친 놈인가? 나는 저 수많은 욕(欲)을 다 비워야 하는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런 혼란스러움에서부터 욕구와 욕망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오쇼는 결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욕구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 역시 욕구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욕구가 인간 본성에 충실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 내가 나의 욕구를 인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먹고 싶은 욕구, 자고 싶은 욕구, 노래부르고 춤추고 싶은 욕구, 섹스하고 싶은 욕구들은 인간 본성에 충실한 욕구들이다. 그러한 욕구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욕구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욕구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가끔 나의 욕구에 대해서 되돌아보기를 할 필요가 있다.
욕구와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욕구와 욕망의 차이에 대해 고찰해보고 나서 혼란스러움은 좀 가셨다.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리속에는 욕구와 욕망이, 그리고 인간 본성에 충실한 욕구와 그렇지 않은 욕구가 섞여 있을 것이다. 욕망과 인간 본성에 충실하지 않은 욕구를 가려내어 제거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리라.
이쯤돼서 지난 주말의 답답함과 불편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난주부터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를 읽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오쇼 라즈니쉬의 강의를 기록한 책이다.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 싶어서 작년 초에 사놓고 몇 십페이지 읽다가 말았다.
처음 책을 들게 된 것은 분명 "욕구"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욕망"이 생겼다. 깨달음에 대한 욕망. 오쇼의 메세지는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리고 강렬하다. 지엽적인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고 핵심적인 대부분의 내용들에 대해 공감한다. 그의 책을 읽다보니 내 마음 속에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생긴 것은 어찌보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 그의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느꼈던 답답하고 불편함의 정체는 바로 그 욕망이 아니었나 싶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나는 아직 한마리 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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